'Age helps'는 '노인이 돕는다'라는 의미로, 국제헬프에이지 네트워크와 함께 국내외 저소득 노인의 자립과 참여, 권리 증진을 지원하는 한국헬프에이지의 철학이기도 하다. 삶에서 노년기가 차지할 기간이 더욱 길어질 미래에 노인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은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Age helps’의 사회적 공명이 커지고 있는 이유이다. 노년의 삶의 질은 복지 서비스의 양과 질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사회적 역할을 맡고 관계를 맺는 일, 자기효용성의 자각은 존엄한 노년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며, 노인을 스스로와 사회를 도울 권리의 주체로 보는 인식 전환은 노인인권 증진의 방향을 다시 세울 출발점이다.
출처: 한국헬프에이지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한 개인이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생애 초기의 지원과 훈련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노인의 주체성과 역할 회복의 중요성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채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다루어지는 현실은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관련 정책과 프로그램이 정해진 기한 내 산출해야 할 성과나 도달할 지표가 있는 현실적 제약을 갖고 있지만, 노인의 주체성 회복은 생애 초기 양육과 마찬가지로 지름길이 없고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들여야만 하는 과업이다.
한국헬프에이지는 ‘노인이 돕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노인참여나눔터” 사업이 있다. 필리핀의 노인 자조공동체 모델에서 영감을 얻어 2004년 시작된 노인참여나눔터는, 저소득 노인이 스스로 모임을 이루고 지역사회 참여와 나눔을 실천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한국 지역사회의 현실에 맞게 발전해 온 이 모델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현재 한국헬프에이지와 협력기관 16개소가 총 20개소의 나눔터를 운영하고 있다[1].
지난 5월,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이하 AGAC)는 서울 화곡 및 신월 노인참여나눔터를 방문하여 참관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번 취재노트에서는 느리지만 분명한 발걸음으로 노년의 주체성과 존엄을 일상속에서 회복해가는 노인참여나눔터의 현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화곡 노인참여나눔터[2]의 문을 열자 소박하지만 활기 넘치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캘리그라피 수업에 참여중이던 회원들이 낯선 방문자들에게 건네는 환영의 인사는 조심스럽다기보다 자부심과 반가움으로 가득했다. 회원들은 한 자 한 자 정성들인 서로의 작품을 감상한 뒤 매주 진행하는 회의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활동과 배움, 운영과 유지에 관한 모든 사항은 회원들의 회의와 투표로 이루어진다. 회의 역시 회원들이 직접 선출한 임원진(회장과 부회장, 총무 등)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노인 시설에서 고도의 사회적 절차가 도움 없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노인은 수동적 존재라는 잘못된 통념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안건은 청소 당번을 정하거나 나들이 장소를 고르는 일상적 사안부터 복지기관과의 협력, 지역사회 나눔 등 대외적 결정까지 다양하다.
화곡나눔터의 캘리그라피 수업 현장(출처: AGAC)
각 나눔터에는 회원들의 자치를 지원하는 활동가가 배치(화곡, 신월의 경우 이후 소개될 박경미 활동가가 지원한다)되지만, 개입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활동가는 모니터링만 할 뿐 회의 진행의 주체는 임원들이다. 회의 시작에 앞서 회원들은 보드에 걸린 ‘노인참여나눔터 활동수칙’을 함께 읽었다.
화곡노인참여나눔터의 정기 회의 모습(출처: AGAC)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자”, “끼리끼리 놀지말자”,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따르자”, “회원 간에 돈거래 하지 말자”와 같은 다소 투박하나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중요한 사회적 약속들. 2004년부터 지금까지 시행착오로 쌓아온 지혜였다.
이날의 주요 안건 중 하나는 다가오는 어린이 날을 위해 지난 해 실시한 ‘떡볶이 나눔’을 올해도 진행할 것인가 였고 회원들은 ‘동네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
회의에 앞서 활동수칙을 읽는 모습(출처: AGAC)
다는 게 좋다’는 낙관파와, 같이 참여하는 부모님들을 준비에 참여시켜야 할 지를 고민하는 신중파로 나뉘었다.
화곡나눔터는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지역 청소년 센터의 요청으로 나눔터에서 배운 양말목 공예를 재능기부의 형태로 가르치기도 하고, 전통시장 활성화 축제에 합창 공연으로 함께 한다거나, 2025년에는 매주 수요일 꼬박 한 해를 연습한 숟가락 난타 공연으로 새해를 축하하는 등 지역사회에 유익과 색채를 더하고 있었다. 때로는 바자회 판매 등에서 창출된 수익 일부를 다시 지역사회에 기부한다고 한다.
세대를 잇는 새해 축하 숟가락 난타 공연 당일과 연습현장(출처: 한국헬프에이지 공식 홈페이지)
박경미 활동가의 말에 따르면 나눔터는 종종 “수혜자에서 기여자가 되는 전환점”이 된다. 매주 정성스럽게 제공되는 반찬과 명절선물 등 나눔터와 지역사회에서 받은 후원에 대해 회원들은 기꺼운 기부와 재능나눔으로 응답하고 있다. ‘유대,’ ‘자치,’ ‘참여와 나눔’이라는 서로 간의 단단한 약속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경험한 배려를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관계와 돌봄의 순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박경미 활동가는 활동가의 역할을 “어르신의 생각과 말을 모아 구체화하는 일”로 소개한다. 한 예로 회원들이 관심있는 지역사회 사업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면 이를 바탕으로 활동 계획서를 작성한다. 실제로 한 지역사업 공모에 참가했을 당시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활동가가 작성한 제안서를 제안사업 발표회에서 회원이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나눔터의 모든 활동은 느린 과정을 견디는 데서 출발한다. 활동가가 혼자서 한 시간 안에 끝날 일이 회원들과 함께하면 일주일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한 걸음 나아갔다 생각한 순간 두 걸음 물러나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회원들이 스스로 서게 되는 과정임을 안다. 그래서 때로는 못하겠다는 말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을 긋는 강한 태도를 보인다. 활동가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것, 활동가의 지원이 점차 임원들의 몫이 되고, 임원의 활동을 일반 회원들이 맡게 되는 평균적 상향이 활동가의 목표이다. 그의 기다림은 이제 다소 편안히 휴가까지 갈 수 있는 여유로 돌아왔다. 예전에 활동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나눔터 오픈과 회의, 청소 및 뒷정리까지 임원을 중심으로 회원들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경미 활동가가 현장에 부재했던 기간 동안 지역 복지기관과 직접 네트워킹을 통해 새로운 협력 활동의 기회를 만들어 온 회원도 있었다.
신월노인참여나눔터에서 (왼쪽부터) 박경미 활동가(한국헬프에이지), 홍의열 과장(한국헬프에이지), 이경순 회원, 권정순 회장, 박난희 부회장과 함께(출처: AGAC)
박경미 활동가는 나눔터에서 가장 기쁜 순간으로 회원들이 무언가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제로 지원해 줄 수 있을 때를 꼽는다. 경험과 자원의 부족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살아온 회원들이 익숙한 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고 세대 간 편견을 해소하는 것은 노인참여나눔터 사업의 현 핵심 목표이다. 나눔터에서 노인은 더는 변화가 어렵거나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지 않은 고정된 존재가 아닌, 여전히 배우고 성장하며 자기 세계를 넓히는 유동의 존재이다. 한 사람안의 가능성과 힘을 끝까지 긍정하는 활동가와 회원들의 태도는 나눔터에서 느껴지는 생기의 원천이다.
노인참여나눔터의 자치성은 개별 나눔터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매년 전국의 나눔터 임원들이 모이는 “임원연대모임”은 한 해 동안의 성과와 고민을 나누고 격려하며 Age helps의 가치를 실현하는 또다른 플랫폼으로 역할한다.
노인참여나눔터 사업 담당자인 홍의열 과장은 나눔터가 타 노인시설과 차별화되는 강점으로, ‘참여와 나눔,’ ‘자치력’에 이어 이러한 ‘네트워크력’을 꼽는다. 서로의 성과에 자극을 받고, 한 나눔터의 시행착오가 다른 나눔터의 배움이 되는 구조이다. 노인참여나눔터의 성장 지표는 개소 숫자와 같은 가시적 성과가 아닌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며, 함께 돌아보고, 다시 해보자고 격려하는 느린 연대의 공고함이다.
2026 상반기 전국노인참여나눔터 임원연대모임(출처: 한국헬프에이지 공식 홈페이지)
2026 상반기 임원연대모임에서 각 나눔터의 활동을 발표하는 모습 (출처: 한국 헬프에이지 공식 홈페이지)
올해의 주안점 역시 ‘확장’보다는 ‘내실’에 가까웠다. 전국 곳곳에 더 많은 나눔터가 생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기존 공동체들이 나눔터다운 문화와 운영 원칙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각 나눔터의 회원수 확대에 신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인 자조공동체는 회원을 모으고, 서로 신뢰를 쌓고, 공동체의 원칙을 익히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회원 모집에만 1년 이상이 필요하고, 공동체가 실제 자리를 잡기까지 더 긴 시간이 요구되기도 한다.
회원 모집은 단순히 복지 대상자를 발굴해 인원을 채우는 과정과 확연히 다르다. 사업 초창기에 한국헬프에이지 직원들은 대상 지역의 저소득 노인을 한 분 한 분 직접 만나 나눔터를 소개했다. 이곳이 단순히 지원을 받는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 교육과 연대활동에 참여하고 지역사회 나눔을 실천하는 공동체임을 설명하며 ‘삶의 주체’로서의 인식을 고취하는 활동이었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익숙해진 노인들이 다시 자신의 가능성을 믿도록 하는 일은 고된 작업이다. 때때로 종교나 영리 목적의 모임으로 오해받는 해프닝도 발생하지만 헬프에이지는 이러한 느린 방식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신규 회원 오리엔테이션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신규 회원은 3주 연속 빠짐없이 나눔터 모임(보통 주 2회 이상 운영)에 참가하여 공동체의 분위기와 원칙을 익히고 스스로 참여 여부를 결정한다. 건강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결석할 경우 첫 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격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과정들이야말로, 오늘날 회원들이 나눔터의 정체성과 원칙을 스스로의 약속으로 여기고 이어가는 힘이 되었다. 이에 신규 나눔터 위탁운영을 위한 협력기관 모집에 있어서도 나눔터 사업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기관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인터뷰에 참여한 (왼쪽부터) 이경순, 박난희, 권정순 님(출처: AGAC)
두 번째 방문지였던 신월 노인참여나눔터[3]에서 만난 권정순 회장(85)과 박난희 부회장(93), 이경순 회원(84)은 나눔터 생활로 바뀐 삶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하며 이곳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했다. 서로 오게 된 계기와 경로는 다르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나눔터를 상호 돌봄의 생활공동체로 이해하고 있었다.
2019년부터 나눔터 모임을 시작한 권정순 회장은 총무를 거쳐 3년째 신월나눔터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일로 보냈지만 여든이 넘어 처음으로 조직의 임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경험했다. 그가 말하는 임원의 역할은 출석을 확인하고 회원들을 인사로 맞이하는 일, 회의 진행, 행사와 외부 일정에서 안전을 살피는 일, 입원한 회원을 위한 병문안까지 다양하다. 청소 당번이 몸이 불편할 때는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모두의 시간 관리를 돕고, 회의의 질서를 세우며, 함께 지킬 약속을 확인하고, 더 취약한 회원을 챙기는 임원들의 모습은 노년의 리더십이 반드시 거창한 세팅이나 자질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박난희 부회장과 이경순 회원은 기존 노인시설과 다른 나눔터만의 장점으로 “가정같은 화목함”과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는 포용을 꼽는다. “서로 험담하지 않고, 들어주고, 보듬는 곳”이라는 그들의 설명은 공동체의 정서를 잘 드러낸다. 나눔터 생활 3년 차인 이경순 회원은 복지관의 ‘자서전 쓰기 수업’을 듣다 청력이 좋지 않아 강의를 잘 따라갈 수 없어 중도 하차한 경험을 나누며, 개개인의 경제적, 신체적 제약 등으로 모든 노인을 포용할 수 없는 많은 노인 복지시설의 현실을 강조했다. 반면 결과물보다 과정이 중요시되는 나눔터에서는 다시 묻고 서로 도와가며 천천히 따라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박난희 부회장은 매년 10월 전국 노인참여나눔터 회원이 참여하는 “실버운동회”를 예로 꼽으며, 노인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체육행사의 즐거움과, 누가 더 잘하는가보다 모두가 뒤처지지 않고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한 곳이 주는 안정감에 대해 나누었다.
2023년 실버운동회의파도릴레이장면 (출처: 한국헬프에이지 공식 홈페이지)
노인참여나눔터가 보여주는 존엄하고 활동적인 노년의 모습은 제도 언어가 그리는 희미한 청사진이 아닌 일상의 온기가 느껴지는 실재이다. 현재 입법 심사 중인 노인인권기본법안에 담긴 노인의 독립성과 자주권, 참여권과 자아실현의 권리가 그저 지향점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회의에서 손을 들고 의견을 말하는 일, 한 해의 활동을 함께 정하고 몸이 불편한 회원의 속도에 맞춰 걷는 일, 자신이 익힌 공예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 작은 수익을 모아 다시 지역사회에 돌려주는 일. 이 모든 장면은 ‘노인도 노인을 도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데서 나아가 이들이 돌봄의 수혜자인 동시에 여전히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독립적 주체임을 보여준다.
오늘도 화곡과 신월 나눔터는 시혜를 넘어 관계로, 보호를 넘어 자치로, 돌봄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노년이 미래의 당연한 풍경이 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천천히 다져가고 있다.
[3] 평균 연령 85.8세의 회원 20명이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