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의 언어로 전하는 위로와 응원, ‘신이어마켙’



< 신이어마켙의 제품들: 스티커(맨 위), 손그림 화투(가운데), 절기 달력(아래) (사진 : 아립앤위립 제공 >
‘너무 잘하려 하지 말고 적당이 해라’
‘기왕에 태어났으니까 멋지게 살아봐’
‘반드시 해뜰날 온다 젊잔애’
위 문장은 ‘신이어마켙’이 만든 손글씨 응원 스티커에 쓰인 문구들이다. ‘신이어마켙’은 어르신들이 직접 쓴 글씨와 그림을 청년들이 노트, 엽서, 달력 등 굿즈로 개발하는 브랜드다.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눌러 쓴 글씨에는 따스함과 정겨움이 묻어나고, 손주들에게 건네는 듯한 다정한 조언은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는 청년 세대에게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어르신들의 언어는 진솔하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는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 ‘돈은 지 맘대로야 우리 말을 너무 안 들어’ ‘다먹으면 당뇨혈압’ 같은 문구에는 위트와 유머가 담겨있고, ‘출근하기 싫으면 사흘을 굶어봐라 짜식아’ ‘팔십이 넘어서도 고민하는데 쓸데없다’ 에서는 촌철살인의 통찰력이 느껴진다.
신이어마켙은 사회적기업 ‘아립앤위립’이 운영하는 브랜드로, 취약계층 어르신들에게 창작 활동과 관련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브랜드명은 ‘시니어’라는 표현을 모르는 어르신들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신이어’와, 다양한 물건을 파는 ‘슈퍼마켙’의 ‘마켙’을 합친 이름이다. 신이어마켙은 손그림으로 그린 화투와 달력, 수제 노트, 그림엽서, 스티커 등 다양한 제품에 어르신들의 언어와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에서는 ‘아립앤위립’ 의 심현보 대표를 만나 세대 간 소통과 공감, 지속가능한 시니어 일자리 모델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래) 인터뷰 당시 회의실 모니터에 띄워주신 환영의 메시지.
(사진 :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 촬영) >
< ‘아립앤위립’ 심현보 대표 (사진 : 아립앤위립 제공) >
[ 지속가능한 사회적기업 ‘아립앤위립’의 철학 ]
아립앤위립은 2017년 10월 설립되어 올해로 9년차를 맞이했다. 아립앤위립이란 이름에는 나를 세우고(我立/아립) 우리를 세운다(We立/위립)는 뜻이 담겨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회사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심현보 대표는 거리에서 폐지를 주워 몇천 원에 되파는 노인들의 현실을 보고 폐지수거를 대신할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어르신들의 창작을 일자리로 연결하는 ‘신이어마켙’의 출발점이 되었다.
흔히 사회적기업은 정부나 지자체 등 공공의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립앤위립은 창업 초기를 제외하고는 정부 지원금 없이 자체 수익만으로 9년째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왔다. 이는 신이어마켙이 단순한 윤리적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적인 매력을 갖춘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 청년 세대와 노인 세대가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
신이어마켙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는 세대 간의 소통과 공감이다. 심 대표는 세대 간의 단절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서로 교류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매스컴에 보도되는 극단적인 사례들이 세대 간 인식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어마켙은 이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어르신들의 언어를 통한 세대 간 공감의 경험을 제안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따뜻한 순간, 신이어마켙” 이라는 슬로건처럼, 청년들은 어르신의 손글씨에서 따스함과 위로를 느끼고, 어르신들은 자신의 말이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교류는 WHO가 연령주의 극복의 핵심 전략으로 제시하는 ‘세대 간 접촉과 이해의 확산’ 과도 맥을 같이한다.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의 공존은 신이어마켙의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루어진다. 신이어마켙을 운영하는 아립앤위립의 구성원 22명 중 절반은 청년, 절반은 시니어다. 청년들은 제품 기획과 홍보를, 시니어들은 글씨와 그림 등 디자인과 만들어진 제품의 포장 업무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협업하고 있다. 이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를 ‘OO님’으로 부르며 존중한다. 또한 모든 구성원이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는 특별한 조직 문화가 있다. 청년과 시니어가 함께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어르신이 직접 준비해 온 반찬을 나누며 식사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이 되고, 세대 간 벽을 허무는 순간이 된다.
[ 복지의 대상을 넘어, 노인인권의 주체로 ]
2025년 10월 현재 신이어마켙과 함께 하는 고령자는 총 11명이다. 이 중 정규직 1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들은 자신의 건강과 생활 리듬에 맞춰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초창기에 지역 복지관을 통해 연결된 어르신들은 ‘정예멤바’로 불린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80대로, 글씨와 그림 작업을 맡는다. 이후에는 지역 시니어클럽을 통해 평균 연령 70대 정도의 어르신들이 합류해, 완성된 제품의 포장과 마감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신이어마켙이 창출하는 노인일자리는 제품 제작 시의 저작권료 지급, 포장 일자리, 기술 일자리 등이다. 시니어들이 그린 그림이나 글씨를 활용하여 제품이 만들어지는 경우 일정 금액의 저작권료를 지불한다. 만들어진 제품을 포장하는 업무의 경우 최저임금이 적용되며, 봉제나 프레스 등 기술이 필요한 작업의 경우에는 사전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한 뒤 서울시 생활임금 기준에 맞춰 임금을 제공한다. 또한 판매수익금의 일부(순이익의 10%)는 지정후원금 형태로 시니어 파트너들에게 전달된다.
신이어마켙에서 고령자는 복지의 대상이 아닌 창작자이자 노동자이다. 이곳은 고령자들의 재능과 경험을 창작의 형태로 사회와 연결하며, 고령자를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바라본다.
신이어마켙의 제품에는 어르신들의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맞춤법이 틀린 문구도 있고, 때로는 오타를 X 표시로 정정한 부분도 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어르신들이 지나온 삶과 있는 그대로의 현재 모습에 대한 존중의 뜻이다.
또한 신이어마켙은 시니어 구성원을 쉽게 충원하지 않는다. 체력이 달리거나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는 등의 이유로 시니어 쪽에서 먼저 그만두는 경우 외에는 한 번 맺은 인연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자율성과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일자리 구조는, 공공 노인일자리가 기간제로 운영되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기존 참여자의 연속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협업을 통한 브랜드 가치 확산 ]
신이어마켙은 다양한 기업 및 브랜드와 협업하여 세대 간 소통과 다양성의 가치를 확산시키고 있다. 기존의 제품에 신이어마켙의 독특한 색깔을 더해 만들어진 컬래버레이션 제품은 주 소비자층인 청년들에게 신선함과 따뜻함이 어우러진 경험을 제공한다.
첫 협업 사례는 SK텔링크의 알뜰폰 브랜드 ‘SK세븐모바일’의 친환경 배송 패키지였다. 친환경 재생지로 만든 스마트폰 배송박스와 유심봉투에 어르신들의 글과 그림을 담은 것이다. 배송박스에는 손글씨로 ‘전화 잘 받고 차조심해라’ ‘자주 자주 통화하자’ 등의 정감 가는 문구가 쓰였다. 흔히 유심 칩만 떼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유심카드는 네임택으로 다시 쓸 수 있게 디자인하고, ‘아껴야 잘산다’ ‘절약하는게좋은거야’ 등의 문구와 함께 그림을 넣어 의미를 더했다.
이후 2023년 화장품 브랜드 스킨푸드와 협업하여 만든 ‘당근 패드 기획세트’ 디자인 또한 큰 호응을 얻었다. 기존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을 어르신들의 손그림과 손글씨로 변경한 이 버전은 열흘 만에 품절되었고, 이후 발매한 홀리데이 에디션 제품도 보름 만에 완판되었다.


< (위) ‘SK세븐모바일’ 친환경 배송 패키지.
유심봉투에는 “요 쪼끄만게 뭐시여? 유..심?” 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가운데) ‘SK세븐모바일’ 유심카드 틀
(아래) 스킨푸드 ‘당근 패드 기획 세트’ 디자인 > (사진 : 아립앤위립 제공)
이 밖에 다이소, CU, 카카오, 에어로케이 등 다양한 기업들과 꾸준히 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네이버와 함께 한글날 캠페인 ‘한글한글 새삼스레’ 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캠페인에서 어린이들과 어르신들은 ‘눈치’, ‘멋’, ‘서운하다’ 등 한글 단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고, 온라인 참여자들에게는 신이어마켙 어르신들의 답장과 스티커 세트가 전달됐다.
신이어마켙의 폭넓은 협업 사례들은 사회적기업의 경제적 자립뿐 아니라 세대 간 공감의 가치가 시장을 통해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신이어마켙에 이어, 세대 통합 일자리 모델의 확장 ]
신이어마켙에서 축적된 세대 간 협업의 경험은 아립앤위립의 또 다른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2025년 2월 대구 수성구에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 ‘할로마켓’ 이다. 할로마켓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과 대구 수성구청, 수성구 시니어클럽, SPC 그룹 등이 참여한 프로젝트로, 아립앤위립이 기획을 맡아 고령자들이 음료 제조와 제품 판매를 맡고 청년들은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협업하는 ‘세대 통합 일자리 및 문화공간’을 선보였다.
신이어마켙에 이은 새로운 세대 통합 일자리 브랜드 또한 준비 중이다. 아립앤위립은 ‘엄마 아빠 일자리를 만들자’ 는 내부 슬로건 아래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상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고용하는 사회적기업 ‘베어베터’와 ‘동구밭’을 벤치마킹해, 업무를 표준화하고 규격화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일자리 모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 마치며 ]
신이어마켙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은 갈 곳이 있어 출근이 설레고 기다려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이어마켙이 ‘나의 새로운 삶’, ‘내 삶의 터전’, ‘희망과 행복’ 이라고 답했다.
그 말처럼, 신이어마켙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고령자들은 자존감과 소속감을 회복하고 청년 세대와 소통하며 공감한다. 신이어마켙은 고령자의 노동을 단순히 복지 정책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 참여의 한 형태로 확장하고 있다. 또한 시혜적 지원에서 권리 기반 참여로의 전환이 현장에서 실현되고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신이어마켙이 보여준 변화는 노년기 노동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신이어마켙에서 고령자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주체이다. 이들은 창작자로서, 청년들과 협업하는 동료로서 관계를 맺으며 세대 간 이해와 존중의 문화를 확산시킨다. 이는 연령을 이유로 한 배제나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하며, “나이 듦”이 곧 “소외됨”을 의미하지 않는 사회의 가능성을 일상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신이어마켙의 사례는 고령사회를 맞이하는 모든 국가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고령자가 존엄하게 일하고, 자신의 경험과 감성을 사회적 가치로 전환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신이어마켙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현실적인 해답이자, 연령 통합 사회를 향한 의미 있는 시도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