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해도 괜찮아요’
치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 들어가는 글 >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은 병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소통 단절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환자 자신은 기억력 저하와 인지 기능의 퇴화로 인해 일상이 점점 협소해지고, 가족들 또한 환자를 돌보면서 사회적 활동이 제한되거나 심리적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등장한 것이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교류하며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는 ‘메모리 카페’ 이다. ‘알츠하이머 카페’ 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공간은 네덜란드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한다. 메모리 카페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이제 아시아 지역에서도 점차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메모리 카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시도가 주목받고 있다. 바로 인지증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서빙하는 카페와 레스토랑이다. 이러한 공간은 단순한 교류의 장을 넘어, 치매 환자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회복하도록 격려하고 치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독창적인 실험모델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델의 선구적인 사례가 2017년 일본에서 시작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이다.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Restaurant of Mistaken Orders)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일본의 전직 TV 방송국 PD 오구니 시로(小国 士朗)가 2017년 도쿄에서 시작한 독특한 팝업 레스토랑이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점』(The Restaurant of Many Orders)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치매 환자들이 홀 스태프로 일하며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요리를 서빙한다. 치매 증상 때문에 음식이 다른 테이블로 전달되거나, 테이블 세팅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예상치 못한 실수가 자주 일어나지만, 손님과 직원 모두 ‘실수를 해도 괜찮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를 포용한다.
이러한 철학은 로고에도 담겨 있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로고는 ‘Mistaken’의 ‘K’ 자가 90도 기울어져 있고, 혀를 쏙 내민 얼굴이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실수했을 때의 쑥스러운 표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치매 환자의 작은 실수조차 웃으며 받아들이자는 메시지를 담아낸 로고는 레스토랑이 추구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에 활발하게 사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라도, 치매가 진행되면 자주 기억을 잃고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된다. 치매 환자들은 이러한 증상 탓에 기존에 자신이 일하던 곳에서 일하기 어려워지며, 자신감을 잃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쉽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치매 환자에게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홀 스태프는 치매가 있어도 아직 더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의욕적인 치매 어르신으로 모집을 받으며, 시간당 천 엔의 사례비가 지급된다. 또한 치매 간병에 대한 지식이 있는 매니저도 자원봉사자로서 어르신들을 지원하기 위해 대기한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영업 시간은 11시부터 15시까지 4시간인데, 이렇게 짧은 영업시간은 치매 환자들의 컨디션을 고려한 것이다. 고령의 스태프들을 위해 누워서 쉴 수 있는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치매 상태의 어르신들에게는 4시간 동안 서 있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주문표에는 테이블 번호와 메뉴 번호가 적혀 있고, 손님이 주문을 하면 메뉴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는 식으로 알기 쉽게 만들어졌다. 이마저도 주문을 받는 치매 어르신들은 한번에 이해하기 어렵거나 주문이 어떤 것인지 곧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에, 스태프들은 주문표를 손님에게 전달하여 손님이 직접 메뉴에 표시를 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도치 않게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손님들이 사전에 인지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손님들도 실수를 받아들이고, 함께 즐기는 분위기가 된다. 보통의 경우라면 치매 환자의 실수는 치매로 인한 불편한 증상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것,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없애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은 실수가 있어도 괜찮다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수가 엔터테인먼트가 되어 어떤 실수가 일어날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는 치매 환자들이 자신감을 갖고 생활할 수 있게 돕고, 치매 환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레스토랑을 기획한 오구니 시로는 PD 시절 치매 환자를 위한 그룹홈을 취재하며 치매 환자들이 직접 일하는 레스토랑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치매 어르신들이 직접 메뉴를 정하고, 장보기와 요리까지 하여 만든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햄버그스테이크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실제로 나온 것은 물만두였던 것이다. 의아했지만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을 보고, ‘이것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경험이 그에게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기획하게 만들었다. 이후 디자인, 미디어, 자금조달, 치매 관련 지식과 간병 기술, 요리 및 레스토랑 운영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아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실행위원회’를 만들고, 필요한 자금을 크라우드펀딩으로 조달하여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2017년 6월 프리 오픈 이벤트를 거쳐,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제1회 이벤트가 도쿄 롯폰기에서 2017년 9월 개최되었다. 이는 곧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READY FOR OF THE YEAR 2017 대상」 과 「일본 마케팅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9년 3월에는 후생노동성에서 제3회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취지에 공감하여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레스토랑世界一やさしいレストラン’ (Kurashiki-shi, Okayama Prefecture / Toyota-shi, Aichi Prefecture), ‘해프닝 라멘ハプニングラーメン’ (Sukagawa-shi, Fukushima Prefecture)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대부분 1~2일의 단기 이벤트로 개최되지만, 월 2~4회 등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경우도 있는 등 지역의 여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개최되었다. 이외에도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영향을 받은 사례는 수없이 많으며 현재도 일본 각지에서 이러한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2018년에는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의 초기 멤버를 중심으로 사단법인이 만들어졌다. 사단법인의 대표는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때부터 오구니 시로와 함께 일한 인지증 케어 전문가 와다 유키오(和田 行男)가 맡았다. 이들은 일본 각지의 식당에서 치매 환자들이 홀 스태프로 일하는 단기 이벤트를 개최하는 한편 치매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한 모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비슷한 시도를 하고 싶은 단체를 대상으로 컨설팅을 하기도 한다.
< 유사사례: 서울시 치매안심센터의 ‘기억다방’ >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 중인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치매 친화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 치매안심센터의 ‘기억다방(기억을 지키는 다양한 방법)’ 이다. 기억다방은 제약회사 한독과 서울시가 협약을 맺어 2018년부터 서울광역치매센터와 서울시 25개 자치구 치매안심센터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치매 인식 개선 캠페인이다.
이곳에서는 경증치매 또는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어르신들이 카페 직원으로 일하며 주문을 받고 음료를 제조한다. 또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과 같이, 주문한 음료와 다른 음료가 나오거나 음료가 나오는 것이 조금 늦어져도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이 규칙이다.
기억다방은 치매 관련 행사 등에서 푸드트럭 형태의 이동형 카페로 운영되거나, 자치구 치매안심센터 내 공간에서 고정형 카페로 운영된다. 고정형 기억다방은 2021년부터 시작했으며 강동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마포구, 서대문구, 서초구, 성북구, 송파구, 은평구 등 총 10개 자치구에서 운영되고 있다(2024년 기준). 2024년 한 해 동안 기억다방은 고정형 859회, 이동형 29회 등 총 888회 운영되었으며, 누적 이용객 수는 32,138명에 달하는 등 활발한 운영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시도는 일상 속에서 치매환자와 시민이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치매 환자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직은 운영시간이나 규모가 한정적이지만,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치매 돌봄의 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 서대문구 치매안심센터 내 기억다방 (사진 : 서울시) >
< 마치는 글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과 '기억다방' 은 단순한 레스토랑이나 카페 그 이상이다. 이러한 곳은 치매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실수를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함께 웃고 즐기는 경험은 치매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향한 작은 발걸음이 된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일본이나 한국뿐 아니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다른 국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기 이벤트와 같은 방식으로라도 치매 환자들이 다시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환자 개인뿐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기억다방' 과 같은 실험적이고 따뜻한 프로젝트들이 각지에서 확산되는 것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포용적 사회를 향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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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Alzheimer’s Disease International(ADI) 홈페이지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공식 홈페이지 (일본어)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한국어판), 오구니 시로, 웅진지식하우스 (2018)